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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카틸리나 독재를 증모했을까 사랑했을까

by @31@^ 2019. 11. 15.

패권문턱서 키케로에 좌절...미완성'으로 최후맞아


권력과 출세를 위하여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상은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형상화하기 이전부터 무수히 존재해 왔다. 그럴듯한 명분과 설득력을 가진 권력추구자를 역사는 긍정적인 인물로 평가하며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학작품에서는 상반된 평가로 엇갈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초기 로마사에서 가장 논란이 심한 인물이 바로 루키우스세르기우스 카틸리나(기원전 108~62)이다.


세계적인 대 웅변가요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던 키케로와 정적관계였던 카틸리나는 그 상대를잘못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한시대를 지배하는 것은 하나의 태 양인데 또 다른 태양이 있는 시대에 태어난 지도급 인사는 결국불행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원전 1세기 무렵 로마는 끊임없는 각종 반란에 직면해 있었다. 이 반란을 평정하는데 공을세운 술라 장군은 강력한 독재체제를 굳혀 공포정치를 실시하다가 죽었다. 바로 이 술라 휘하에서 자기 세력을 길러온 카틸리나는 독재 지향성과 독재체제에 대한 반감이라는 두가지 정치적인 파토스를 다 가졌을 것이다.


술라가 죽자 민주화를 위한 움직임보다는 군부독재를 재구축하려는 음모가 복 잡다양하게 전개되는 혼미가 계속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검투사 출신의 노예 스파르타쿠스가 등장하여 일대 반란을 일으켜서 초기에는 성공하여 로마를 위협할 지경이었다. 노예해방을 목표로 반항했으면서도 황제처럼 지배자가 되어버 린 스파르타쿠스를 가리켜 카뮈는 부조리의 한 표본으로 거론하기도 했는데, 종국에는 실패하여처절하게 전사해버린 이 노예반란사건은 귀족들에게 공화제 보다는 강력한 독재체제를 희구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카틸리나


역사는 언제나 이런 음모와 반란의 반복인지 모른다. 몰락해가는 귀족들은 극우 보수주의적 시각으로 당대의 사태를 바라보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줄 수 있는 제2의 술라를 선택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카틸리나였다.


한차례 집정관 선출에 나섰다가 낙방한 경험을 지닌채 다시집정관 후보로 나선 그는 대중의 인기를 위하여 모든 부채를 탕감할 것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이것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만약 그가 집정관으로 당선 되었다면 술라처 럼 했을지 아니면 술라의 비극을 교훈 삼아 민주주의자가 되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이 아슬아슬한 순간에 대웅변가 키케로가 이 야심가의 앞길을 가로막고 말았다.



키케로는 카틸리나가 공화제를 파괴하려는 음모가라고 폭로하면서 그에 대한 탄핵안을 제출하여 사형을 요청했다. 보수파원로원들이 그를 옹호했지만 이미 카틸리나는 키케로의 웅변술이란 마술에 걸려 정치적인 생명이 끝장나고 말았다. 카틸리나일당은 반국가사범으로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고 그는 간신히도 망쳐 자신의 지지기반인 은퇴한 노군부들이 모여 있던 곳에서 반란을 꾀했으나, 권력쟁취를 위한 전투중 최후를 맞았다. 그 뒤로마에는 시저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는 조용히 카틸리나를 마음 속으로 지지하며 그 수법을배워 실현시켰던 것이다.


영국의 극작가 벤 존슨은 카틸리나의 음모에서 그의 부채탕감을 비롯한 서민을 향한 각종선심정책에 초점을 맞춰 세습귀족 출신이면서도 평민해방을 위 해 애쓴 진보주의자라고 추켜세운다. 헨리크 입센도 초기의 작품 카틸리나에서 타락한 로마의 윤리도덕에 저항하여 진정한 로마정신을 구축하려는 개혁 의지를 지닌 인간상으로 그를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볼테르는 구원받은 로마 혹은 카틸리나에서 그를 독재의 음모가로 보면서 그의 패배가 모히려 로마의 구원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집권을 위해서는 어떤 술수도 마다지 않는 음모가에게 과연 공화제에 대한기대를 걸 수 있을까란 것이 볼테르의 견해이다.이번 선거철에는 얼마나 많은카틸리나들이 국민 앞에 조화를 부려댈 것일까를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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